[강우근 칼럼]마을을 걷는다
골목길 텃밭에는 좁은 공간을 넓게 쓸 줄 아는 지혜가 숨어 있다.
마을을 걷는다
<사계절 생태놀이>,<열두 달 자연놀이>,<강우근의 들꽃이야기>의 작가
강우근의 동네이야기
마을을 걷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또 우리가 거듭 보게 되겠지만-이 세계의 형태가 빛을 보게 된 것은 바로 그 거리의 길모퉁이 그 비좁은 방과 움푹한 구석에서였다. 그런 지형이 이 신화적인 전통의 공간의 평면도라는 것 이외에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런 공간에서는 그런 일이 항상 일어나며 또 정말로 세계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발터 벤야민>
며칠 전 비가 내렸다. 겨우내 기다렸던 봄비다. 이 비를 맞고 개나리, 목련이 활짝 꽃을 피웠다. 정말 젖과 꿀 같은 단비다. 이런 봄비를 흠뻑 맞고 나면 흐드러지게 꽃 핀 저 살구나무마냥 덩달아 꽃 필 거 같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봄비가 방사능 비라니?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무섭고 끔찍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봄비뿐 아니라 세상일이라는 게 이렇게 의미가 달라지기 일쑤 아닌가?
마을을 걷는다. 방사능 비 탓에 걸을 코스를 미리 둘러보지 못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많이 헤맬 것 같다. 왜 마을을 걷나? 날마다 오가는 뻔한 곳을 새삼스럽게 왜 걷는가? 이름난 곳도 아니고 그저 고단한 삶에 찌든 볼품없는 골목에서 무얼 보겠다는 것일까? 오래된 골목길 낡은 집은 못난 것들인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곳인가? 싹 밀어 내고 재개발하면 삶이 빛나고 행복해지는 걸까? 예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집을 수리하는 것이 있었다. 먼저 낡고 지저분한 집을 보여주고는 집을 싹 뜯어 고친 다음 새집을 보여준다. 집 주인들은 눈을 가리고 들어가 바뀐 집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한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집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 새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편하라고 바뀌어 놓은 많은 것들이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게 되지나 않았을까? 다시 예전 것으로 바뀌어 있지는 않을까? 지저분하고 불편한 집은 그 나름대로 삶의 지혜가 배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버려지는 것을 재활용하고 또 유지비가 덜 들게 불편함을 받아들인 것일 테니까.
건축가 임석재는 말한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자 문화이며 문화재다. 그곳을 물리적으로 뛰어난 공간이다. 나는 나를 미치게 하는 창조적 공간을 외국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에서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골목길에는 아직도 넘쳐난다. 그런 골목길이 점점 사라져 간다. 모두 대기표를 손에 들고 철거 순서를 기다린다. 새치기라도 하고 싶어 난리들이다. 나에게 타워펠리스와 골목길 한귀퉁이의 아담한 집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서울 골목길 풍경」>
마을 걷기는 숨은그림찾기이고 어린 시절 소풍가서 했던 보물찾기 같은 것이다. '그 거리 길모퉁이' 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이다. '그 비좁은 방과 움푹한 구석'에 숨은 또 다른 의미를 찾고 마을의 미래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방학 2동 골목길을 걷는다. 대부분 90년대 이후 지어진 고만고만한 다세대주택이라서 다양성이 살아 있는 아기자기한 70년대와 80년대 골목길이 아니다. 지난 시절 지어진 단독 주택, 연립 주택은 다세대주택과 섞이지 못하고 어색하게 남아 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섞이기 마련이지만 그런 시간을 주지 않고 너무 빠르게 다시 부수고 바뀌기 때문에 이렇게 섞이지 못하고 생뚱맞고 흉하게 맞서고 있다. 골목 어귀에는 어김없이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넘쳐나는 쓰레기는 점점 더 골칫거리가 되어간다. 길을 걸으며 인상적인 것을 골목의 텃밭들이다.
요즘은 도시 농업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고 주말농장이 유행처럼 되었지만 유행을 타기 이미 오래 전부터 골목길에서는 텃밭이 일구어져 왔다. 귀퉁이 콘크리트 바닥을 떼어내어 텃밭을 만든 곳도 있지만 대개는 화분이나 고무대야 스티로폼 상자를 이용한 것이다. 냉장고나 물탱크를 이용해서 만든 것도 있다. 이런 텃밭은 오래된 골목일수록 더 많다. 좁은 공간에 차곡차곡 접어 넣듯이 상추나 고추 따위의 푸성귀에서부터 접시꽃이나 봉숭아 같은 꽃까지 오밀조밀 심어져 있다. 이런 텃밭은 좁은 골목을 넓게 만든다. 오래된 골목에서는 조금 불편하지만 적게 쓰고 좁은 공간을 넓게 쓸 줄 아는 지혜가 숨어 있다. 오래된 골목과 함께 이런 삶의 지혜도 부서져서 사라진다.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날, 산처럼 쌓이는 멀쩡한 것들을 볼 때면 이런 물음이 들려 온다. 이렇게 소비하고도 우리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방사능 비가 대답한다. 원자력도 태양력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우리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마을의 미래가 숨어 있다. 그것을 찾아 마을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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